성령강림 여섯째 주간 이모저모 1. 예배 한국교회가 “예배에 목숨을 걸라!, 예배에 성공해야 인생이 성공한다!”라는 구호를 많이 외쳤습니다. 현장 예배에 잘 참석하라는 독려가 주 목적이 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코비드(COVID) 사태를 겪으면서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면서 한국교회는 예배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코비드(COVID)가 사실상 종료된 지금 현장 예배의 열기는 많이 사그라들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이겠다 싶습니다. 다샘교회의 예전 예배는 예배의 패러다임(paradigm)을 전환하는데 기여할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 오프라인 예배는 물론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영적(이성적, 합리적)예배가 더욱 풍성하도록 마음을 모아야겠지요. 설교 발췌 (마 11:16~19, 25~30, 정용섭목사)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는 심리적인 죄의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과 심리적인 죄의식은 다릅니다. 이걸 혼동하면 신앙이 병듭니다. 이걸 구분하기도 쉽지는 않습니다. 예수께 오면 참된 쉼이 주어진다는 말씀이 과연 정당한가요? 이 문제는 근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영혼의 안식을 방해하는 모든 불안과 스트레스와 분노 등은 결국 ‘자기’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데서 옵니다. ‘자기’가 문제입니다. 자기가 빠져야만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제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저 ‘자신’을 빼고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영역에서 벌어지는 골치 아픈 일도 셰익스피어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으로 보는 겁니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대하겠다는 게 아니라 ‘나’와의 관계를 떼어놓고 보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언젠가 이 세상은 ‘나’ 없이 돌아갈 테니까요. 그런 세상을 미리 살아내는 겁니다. 자기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정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자기가 뒤로 물러나야만 세계와 거기서 벌어지는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럴 때 영혼의 안식도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2. 교우 동정 3명의 어린이들이 열심히 잘 출석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모임이 따로 없고 성인들의 예전 예배에 같이 참여하지만 매우 정숙하게 참여합니다. 이들이 어깨 너머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나라의 일군으로 잘 성장하기를 빕니다. 간만에 S권사님이 방문하셨네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뵈어서 반가웠습니다. 더욱 강건하시길 빕니다. 다음 주 특주는 색소폰 찬양연주로 김*수집사님께서 “낮엔 해처 럼, 밤엔 달처럼(최용덕 작사,작곡)”을 연주하시겠다 하시네요. 고백적인 찬양곡, 기대합니다.^^ 중식 후에 도란도란 모여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시원한 예배 실이 카페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다치신 분, 아프신 분들이 계시네요. 모두 쾌차하시길 빕니다. 3. 정용섭목사님의 강독 칼 라너의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강독이 이어 지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칼 라너는 카톨릭의 아주 중심적인 신학 자입니다. 1960년 초에 열린 제2차 로마바티간 공회에서 기존의 카톨릭교리와 신학 체계를 전환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학자의 기도에 관한 책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기도 합니다. 강독시청을 강추(強推)합니다. 한 주간도 대소사를 잘 감당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