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
마 2:13~23, 성탄 후 첫째 주일, 2023년 1월 1일
신약의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똑같이 다룹니다. 그중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동화처럼 전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점성술사였던 동방박사 이야기가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목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좀 더 특이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가족이 애굽으로 피난을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들은 일종의 난민입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떠난 이유는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먼 이국땅에서 얼마간 살다가 헤롯이 죽자 아들 예수와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갑니다. 만감이 교차했을 겁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크게 흉년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이주했다가 수백 년 만에 애굽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모세 오경의 전반적인 내용과 맥을 같이 합니다.
나사렛
요셉은 어디에서 자리를 잡을지를 심사숙고했겠지요. 원래 계획은 예루살렘이나 인근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곳을 유대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22절에 따르면 헤롯의 아들인 아켈라오가 대를 이어서 유대의 왕 노릇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대와 한참 떨어진 갈릴리 지방으로 갔습니다. 대한민국 지도로 본다면 유대 지역은 경상도라면 갈릴리 지역은 경기도쯤 됩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에 모든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갈릴리는 변방에 속합니다. 요셉은 갈릴리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나사렛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 2:23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나사렛 사람’에 각주가 달렸습니다. 우리말 성경 각주가 가리키는 사 11:1절에는 나사렛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새의 가지가 나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가지는 히브리어 ‘네체르’입니다. 내체르는 나실인을 가리키는 ‘나지르’와 단어가 비슷합니다. 나지르를 나사렛으로 마태복음 기자가 해석한 겁니다. 어쨌든지 예수께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예수님의 고향이 나사렛이라는 것만은 문명한 역사적 사실로 보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의 출생과 아기 시절 이야기로 소급시킨다는 점에서 아주 특징적입니다.
나사렛은 구약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에게서 주목받지 못한 일종의 ‘듣보잡’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부른 건 사실상 무시하는 표현입니다. 요 1:46절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예수를 낮춰보던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을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단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께서는 별 볼 일 없는 지역 출신으로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혹시 지역적인 편견이 있는 분들은 이런 표현을 좀 더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낮춰보는 그 지역이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 더 가까울 수 있으니까요. 예수께서는 심지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그런 비난을 예수 당신은 물론이고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역시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느 지역 출신이냐, 명문대 출신이냐, 종교적 교양이 있냐, 강남 사람이냐 촌사람이냐, 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사렛’이 암시하는 초라한, 또는 평범한 삶의 환경을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교회를 예로 들어야겠군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은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겠으나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내로라하는 대형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나 작은 교회를 벗어나려는 욕망이 우리에게 강하게 작용합니다. 여러분 자녀들도 대기업 직원이 되기를 바랄 겁니다. 이걸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렛을 벗어나는 데에 몰두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에 가까이 가기 힘들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가 나사렛 출신이냐 예루살렘 출신이냐와 아무런 상관 없이 선물로 받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사랑의 능력이 연봉에 따라서 결정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영혼의 평화가 그의 사회적 지위나 외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동의하지 않으시나요?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여기시나요?
저는 일전에 대구 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다비아샘터교회 ‘초대의 글’을 쓰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했습니다. 제 나이 일흔 살은 영혼이 더 순수해지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말입니다.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을 실제로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잘못과 부끄러움을 억지로 감추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미 이런 수준에 올랐다는 건 아닙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런 방향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인생 철학에서 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Coram Deo) 선다는 그리스도 영성에서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아무리 버티기 힘든 자리에 떨어져도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자랑스럽다거나 부끄럽다는 것이 영혼 구원에서 핵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장 저주스럽고 가장 비참했던 십자가 운명에 떨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모두 인정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나사렛 사람으로 살아도 하나님의 참된 평화와 사랑의 능력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나사렛 땅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오늘 본문의 진술에서 저는 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 기자가 생각했을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나사렛은 구체적인 지명입니다. 그곳에 땅이 있습니다. 나무도 있고, 꽃도 있습니다. 산도 있고 시냇물도 있습니다. 나비와 벌이 날아다녔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보는 모든 것들을 예수께서도 보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나사렛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았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께서 나사렛 땅에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똑같이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가 두 발을 딛고 살았던 땅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려고 노력하려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산책하시겠지요. 산책만이 아니라 땅에 대한 경험은 무한하게 많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더 많이 경험하는 게 아니고 돈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적게 경험하지 않습니다. 준비만 되면 그런 거와 상관없이 땅을 아주 심층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거기서 매 순간을 생명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신 건 아닐는지요. 땅에서 산다는 경험이 없거나 빈약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과도한 신경을 쓰게 됩니다. 아닌가요?
예수께서 살았던 땅을 제가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두 가지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는 아침 식탁입니다. 남향 창문이 식탁 앞에 있습니다. 창문 밖 가장 가까운 곳에 벚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봄이 되면 거기서 화사한 벚꽃이 피겠지요. 그 앙상한 가지에 새들이 종종 날아와 앉습니다. 빵과 커피와 과일을 먹으면서 그 광경에 빠져듭니다. 이 땅에 생명이 풍성하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저도 그런 생명의 풍성함 가운데서 살아가는 한 사람입니다. 그런 순간에 저에게는 아쉽거나 부족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밤하늘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기에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깊은 밤 마당에 일부러 나갑니다. 겨울철 밤하늘은 유난히 투명합니다. 별이 쏟아질 듯합니다. 예수께서도 분명히 그런 겨울밤을 경험했을 겁니다. 그가 본 별을 나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와 같은 땅과 같은 하늘을 경험하는 사건이 저에게 구원 경험입니다.
그런 자연 경험은 굳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할 수 있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지낼 수 있고, 여행도 다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접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는 일들은 많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그런 경험을 우리가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모든 일상적 경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해도 될는지요. 고급스러운 식당에 갔다고 합시다. 맛난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멋진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 음식 자체보다는 누구와 함께 식당에 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업 파트너와 가는 것과 가족과 가는 건 다릅니다. 예수와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밥을 먹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밥 먹는 행위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그런 자리가 주어진다면 예수께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냐고, 또는 실제로 그걸 극복할 수 있었냐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웃으시면서 대답해주실 수도 있고, ‘당신도 닥쳐보면 알게 될 거야.’ 하시겠지요. 어떤 방식으로든지 예수께서는 저에게 대답을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오늘도 그분이 걸으셨던 땅을 걷고, 그분이 마셨던 물을 마시고, 그분이 보았던 겨울나무와 밤하늘을 봅니다. 나사렛 땅을 오늘 여기서 제가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주로 ‘나사렛’에 초점을 맞춰서 저의 생각을 두 가지로 전했습니다. 하나는 나사렛이 수준 낮은 동네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나사렛 땅도 온 세상에 있는 바로 그 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단순히 문학적이거나 예술적이고 인문학적인 통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시작과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마지막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조와 종말 사이에서 우리는 삽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완성하실 세상에 기대서, 또는 얹혀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의 실존이 불안하기는 하나, 그렇기 때문에라도 ‘하나님의 손’에 의존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손은 우리가 사는 나사렛 땅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땅에서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사렛 사람이신 예수께서도 지금 제가 설명한 것과 비슷한 것을 생각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사람이고 그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 올라섰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저의 구원자이십니다. 다만 그가 실제로 저의 구원자이시기에 그가 나사렛 사람으로 살면서 경험한 것을 저도 똑같이 경험해보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그가 ‘아빠 아버지’라고 가르치신 그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는 저에게 구원자이면서 동시에 저와 똑같이 이 세상에서 두 발을 땅을 딛고 살았던 나사렛 사람입니다.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한한 신뢰심이 생깁니다.
나사렛 사람
정통 신학은 예수의 본성을 ‘베레 호모, 베레 데우스’라고 규정합니다. 전체적인 사람으로서 참된 하나님이지 반쯤만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초기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삶을 진짜가 아니라 그림자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가현설(Docetism)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는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이 있다고 말하기는 뭔가 꺼림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인 교부들은 영지주의 주장을 단호하게 배격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라고 확인 도장을 찍은 겁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는 말이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신은 아닙니다. 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지 않았습니다. 숨도 안 쉬고 먹지도 않으면서 생명을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초월이 아니라 내재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삼위일체에서는 아들로서의 하나님, 즉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 되심을 마태복음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저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할 때의 이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인간이 누군지 아세요? 저는 대충 압니다. 지금의 이 호모사피엔스가 인간인지, 그 이전 호모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이 인간인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아무개라는 사람이 어머니 배 속에 있다가 태어나서 자라서 어른이 되어 늙어 죽습니다. 어느 순간이 바로 그 사람일까요? 사람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지 완성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면 그 아는 것에 짜 맞추려고 사생결단을 할 겁니다. 잘난 사람이 되려는 거지요.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없고, 사람으로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도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니까 크게 안심됩니다. 지금의 ‘나’ 자신이나 ‘타인’의 인간적 한계 앞에서 절망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완성될 그 미래가,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그런 미래가 기다려지니까요. 더 안심되는 건 예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완성되지 않은 사람으로, 즉 제한적인 인간성 안에서 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분명히 우리와 똑같이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인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우리에게 최선의 삶은 참된 사람, 즉 실질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사는 겁니다. 우리는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으로서 사람다워지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다워진다는 말은 자기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안다는 뜻입니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보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사람을 천하에 둘도 없는 고유한 존재로,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 대할 수 있게 될 겁니다. 2023년은 저나 여러분에게 나사렛 땅에서의 삶과 사람으로 사는 삶이 훨씬 풍성해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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