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주현 후 첫째 주일, 2023년 1월 8일 “여호와께 예배하라!”라는 오늘 설교 제목을 접했을 때 너무 당연해서 뻔한 제목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본래 ‘예배 공동체’라고 제가 종종 말씀드렸습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때 교회가 교회다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들도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때 그리스도교 영성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배는 일정한 시간에 함께 드리는 예배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찬양, 기도, 성찬식, 설교 등등, 예배의 모든 순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직결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시 29:1~2절이 이를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라는 문장을 공동번역은 “야훼께 머리를 조아려라.”라고 번역했고, 현대 독일어 성경은 “그분 앞에 엎드려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예배하라는 말과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개념적으로 똑같습니다. 일종의 오체투지처럼 자기를 완전히 낮추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간혹 ‘경배와 찬양’ 류의 예배에서 보듯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에 도취해서 멋들어지게 찬송을 부르고 춤추는 게 아닙니다. 그냥 납작하게 자기를 낮추는 태도라고 보면 됩니다. 토네이도 한복판에 우리가 빨려 들어갔거나 들판을 걸어가는 중에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아주 강한 비바람을 만났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몸을 웅크리고 땅에 엎드려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게 곧 예배의 본질입니다. 여호와의 소리 이런 예배 태도와 본질이 설교 본문에 ‘여호와의 소리’라는 표현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그 여호와의 소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압도합니다. 3절은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으며,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낸다고 했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늘 너머에 물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우렛소리가 물 위에서 내려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 하늘, 또는 하늘 너머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의 근원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울립니다. 5절은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는다고 했고, 7절은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른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압도적인 힘의 원천이신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게 우리 인간에게는 최선입니다. 그게 곧 예배입니다. 오늘 시편 본문에 묘사된 자연 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우습게 생각하는 현대 지성인들이 없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우주 물리학을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과 우주와 역사를 알아야 얼마나 압니까? 저는 과학을 부정하지 않고 폄하하지도 않으며, 성경과 신학이 모든 문제에 대답을 제공한다고 고집부릴 생각도 없습니다. 자연과학은 세상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여러 관점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것을 절대화하지는 않습니다. 비유적으로 양파를 생각해보세요. 무한 숫자에 해당하는 껍질이 있는 양파 말입니다. 자연과학은 그 양파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껍질층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껍질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껍질이 나옵니다. 그 껍질을 이해하는 데에 자연과학은 도움을 주지만 그 중심을 알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철학과 신학이 도움을 줍니다. 그런 철학과 신학의 전통이 성경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전통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삶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세계상에 문자적으로 매달리지 말고 그런 표현을 통해서 말하려는 핵심이 무언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으나 모든 자연 현상을 압도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느꼈습니다. 그 존재는 사람이 대처할 수 없는 힘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4절) 이런 표현이 실감 나지 않으면, ‘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2022년이 순식간에 지났고 이제 2023년이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시간을 막지 못합니다.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 말은 하나 그건 이론일 뿐이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과학이 더 발전하면 모든 물리적 비밀을 다 밝히고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세상은 자연과학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세상이겠지요. 그럴 리가 없으나 만에 하나 그런 세상이 오더라도 저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인공지능 컴퓨터가 미리 알려주는 세상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 기계 세상일 테니까요. 저는 오늘 시편 기자가 말하는 그런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그분을 예배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열린 미래의 주관자이신 그 하나님께 저의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맡기겠습니다. 인간 실존의 한계 여호와께만 영광과 능력을 돌리라는 말은 인간 실존의 한계가 얼마나 분명한지를 뚫어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동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인간 실존의 한계를 뚫어볼 수 있고, 인간의 실존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볼 줄 알아야 여호와의 능력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느낍니다. 먼저 인간의 인식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앎은 아주 제한적입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자연과학적인 인식도 아주 제한적입니다. 무엇이 물질의 핵심인지도 아직 모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큰지, 물질이 얼마나 작은지, 빅뱅 이전은 무엇인지를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일상적 차원도 그렇습니다. 내일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저는 전혀 모릅니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겠으나 깊이 들어가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상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일상이 지구 전체, 그리고 우주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5분만 숨을 안 쉬면 할 존재라는 사실에서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가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100억 원의 재산이 있는 사람이나 무일푼인 사람이나 궁극적인 실존에서는 다 무기력한 겁니다. 조금 더 말씀드립니다. 대한민국에서 인기몰이할 줄 아는 배우나 가수나 정치인 역시 이름 없는 소시민과 마찬가지로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변소에 가서 볼일을 봐야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가 없고, 잘난척할 수도 없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한 인간들이 서로 키가 크다고 자랑한다면, 도토리나무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도토리나무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도토리라면 키 자랑하지 않고 도토리나무 앞에 납작 엎드릴 겁니다. 그게 바로 예배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이런 실존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 아는데도 예배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 이런 궁극적인 실존을 외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작은 차이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듭니다. 눈만 뜨면 아파트값이 어떻고, 주식값이 어떻고, 누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노후 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등등, 이런 문제가 우리의 삶을 과도하게 지배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살다 보니 우리의 궁극적인 실존은 실종됩니다. 잊힙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현상이 조금씩이라도 개선되면 좋겠으나 별로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 믿어도 마찬가지라면 그 신앙은 헛수고 아닐는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제국의 안정된 삶을 벗어나서 미디안 광야로 뛰쳐나온 출애굽이 필요합니다. 애굽에 머물러 있는 한 그 체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출애굽이 오늘 21세기를 사는 개인에게서 가능한지, 실제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인간의 자기 영광 그 답을 찾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여호와께 예배하라.”라는 말의 이면을 눈여겨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이면은 사람이 스스로 영광을 받으려는, 예배받으려는 행태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가리킵니다.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는 근동의 여러 제국이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 주변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그런 제국은 자신들을 절대화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군사, 정치, 문화, 예술 등등은 주변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제국의 황제는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자신들의 절대화에 방해를 받는다고 판단되면 전쟁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절대화는 삶의 파괴입니다. 겉으로는 무언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겁니다. 일종의 우상입니다. 우상 숭배를 성경이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우상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영광을 받을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뜻입니다. 자격이 안 되는데 영광만 구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오직 여호와께만 영광을 돌리라고 말입니다. 21세기 현대인들도 자기 영광을 구하고 싶다는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치에서 민주화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잘살게 되었으나 자기 영광을 향한 열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대 사회처럼 제국은 아니나 여전히 제국 흉내를 내는 나라가 지금도 많습니다. 옛날의 제국이 오늘날은 초국가 기업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년 동안 대장동 개발 사건이 뉴스 보도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남시 부동산 개발 이익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를 놓고 이전투구가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런 사업에 수백억 원의 돈을 어느 누군가가 챙기거나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일종의 제국처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이데올기로 작동된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돈이 신이고, 그걸 다루는 자기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런 데에 몰두하는 사람이 어떻게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고, 여호와께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는 한두 사람의 부도덕성으로 인해서 벌어진 게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에 관련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일들을, 그러니까 자랑거리가 될만한 일들을 손에 꼽아보십시오.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웠나요? 자식들이 훌륭한지 아닌지 무엇으로 알 수 있나요? 우리 주변에 착한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니까 칭찬에 인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착하지 않습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런 노력도 없으면 세상이 너무 살벌하기는 하나, 착하게 살려고 지나치게 애쓰다가 병든 사람들도 많습니다. 늙어도 미모를 잃지 않는 배우나 가수가 있나요? 그걸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걸 유지하려는 수고가 엄청납니다. 책을 많이 쓴 사람도 있긴 합니다. 그가 참된 지식인이나 소설가나 시인이라면 부끄러워서 그걸 다 불살라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이 아예 하나도 없다는 말이냐, 하고 반문하고 싶으시겠지요.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 인간에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에 물들었다는 성경의 증언이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나름으로 진실한 사람은 그 사실을 알기에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전통은 예배 때마다 ‘키리에 엘레이송’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말입니다. 평화의 복 오늘 저의 설교를 너무 비관적으로 듣지 마십시오. 그게 아닙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보시라는 뜻입니다. 그걸 직시할 때만 하나님의 구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여호와를 예배하라.’라는 말씀이 정작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평화의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자 희망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평화의 복을 약속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을 때 그 평화가 선물로 주어지는 겁니다. 왜 그런지를 여러분은 이미 아셨을 겁니다.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지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모두가 태양 빛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서로 싸울 일은 없습니다. 이미 앞에서 잠깐 짚었지만, 조금만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의 조건을 붙들고 살고 싶으세요?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보세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목사니까 목사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교회당을 멋지게 지었습니다. 다른 목사들이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다가 성경적이지 않은 내용을 이야기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건축 과정에서 남은 빚을 갚을 걱정도 많습니다. 개혁적인 목사도, 도덕적인 목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일흔 살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훈장도 아닌데 자꾸 나이를 거론하는 것 같아서 우습군요. 이제부터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드는 설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겠습니다. 그런 설교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대단한 설교자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설교를 모두가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목사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목사에게는 원래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없는 능력을 있는 것처럼 포장하려다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겁니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하나님의 압도적인 힘을 선포할 생각입니다. 그게 목사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2023년이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해서 한해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여호와께 예배하라.’라는 시편 기자의 외침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도록 합시다. 훨씬 더 납작 엎드리는 삶의 태도를 갖추는 겁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압도적인 능력에 사로잡혀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입니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남의 떡이 더 큰지 확인하려고 허둥대지 말고,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고 신경 곤두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살아갑시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평화의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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