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말라!
마 10:24~33, 성령강림 후 4주, 2023년 6월 25일
십자가 공동체의 숙명
마태복음 10장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제자로서의 삶에 관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 내용에서 비장미가 느껴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첫 단락인 마 10:24~33절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당시 제자들에게 놓인 상황이 몹시 심각했다는 뜻입니다. 28절을 읽어봅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여기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의 적대자들이고 제자들의 적대자들이며, 더 크게는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시절의 그리스도인들을 적대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반그리스도교 행위에 대한 설명이 마 10:17절 이하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고대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인 공회에 넘겨주고 종교 집회 장소인 회당에서 채찍질합니다. 18절에는 예수 제자들이 총독과 임금 앞에 끌려간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21절의 내용은 더 끔찍합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한다고 했습니다.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불편한 표현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제자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기 전에 이미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미움과 중상과 혐오와 오해를 충분히 받았습니다. 24, 25절에서 제자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선생이 당하는 어려움보다 크지 않다고 했습니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다.’라는 표현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큰 능력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마 12:24)이라고 비난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운명이었던 십자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후로 제자들도 온갖 박해를 받았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순교도 당했습니다. 이런 박해와 순교는 십자가 공동체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갑자기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을 비판하신 건 아닙니다. 안식일 논쟁과 예루살렘 성전 논쟁에 휘말리면서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일이 있었습니다. 안식일 법에 따르면 그건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로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한 종교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상대 못 할 인물로 대했습니다. 그렇게 사이가 벌어지면서 급기야 예수에게 회당 출입 금지 조처가 내렸고 로마법에 따라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신성모독과 치안 소요죄라는 명목으로 일종의 ‘마녀사냥’을 당한 겁니다.
예수께서 당한 박해와 모욕과 순교 사건이 1세기 후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벌어졌습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무너진 다음부터 그리스도인은 회당에서 축출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회당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로마 체제 안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황제숭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했습니다. 황제숭배 의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공공의 영역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단적으로 로마의 관리는 될 수 없었겠지요. 그리스도인은 로마의 이교 문화도 거부했습니다. 바울도 고전 8장에서 언급한 시장에서 파는 고기 문제가 그것입니다. 당시에 고기를 먹는 일은 일반 사람들에게 쉽지 않았습니다. 소나 양을 잡는 일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소나 양고기를 먹으려면 이교 제사의식에 참석해야 합니다. 시장에 나오는 고기는 모두 이교 신전에 받쳐졌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들을 멀리하니까 일상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보았습니다. 요즘 군대에 가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을 이상한 사람들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차별금지법을 앞장서서 반대하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과 거의 비슷하게 행동하는 겁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는 로마 황제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그리스도인을 마녀로 모는 겁니다.
십자가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박해와 순교는 2천 년 전 이야기이기에 오늘 우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어려움 없이 평온하게 살아가는 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겁니다. 별로 바람직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얼마나 편안하게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인다워지느냐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조건에 전력하는 게 아니라 행복의 현실을 찾는 능력에 전력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롬 5:20b)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에게 절망하는 깊이가 깊을수록, 어려움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사랑받는 사람으로 살고 싶으세요, 아니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으세요? 여러분은 돈을 많이 벌고 싶으세요, 아니면 돈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으세요?
몸과 영혼
‘몸은 죽이나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문장에서 몸은 쉽게 이해되나 영혼은 그렇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인간과 삶을 주로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행위는 모두 몸으로 진행됩니다. 정신적인 문제도 뇌라는 몸의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육 이원론을 극복해야만, 아니 더 철저하게 몸을 중심으로 생각해야만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의 몸을 낮춰서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에 몸을 부정하는 건 성경의 인간 이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몸으로만 성립되지 않습니다. 몸과 영혼의 결합으로 인간이 됩니다. 여기서 영혼은 몸의 손상으로 멸절되지 않는 인간 본질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아직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사실 모르는 게 많습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모르는 게 더 늘어납니다. 의학 지식이 깊은 사람일수록 인간의 몸에 관해서 모르는 게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물리학이 양자 역학까지 왔으나 여전히 물질의 본질을 완전하게는 모릅니다. 인간 영혼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 곧 종말이겠지요.
영혼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도는 분명히 압니다. 영원성을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그것입니다.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할 줄 압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의 총합이 하나님 경험입니다. 영혼이 있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표상은 시대마다, 그리고 민족마다 다르긴 합니다만 자기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대상을 찾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종교성도 진화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니까 그런 종교 현상만으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영혼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자연과학자들, 엄격한 진화론자들, 뇌과학자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 주장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식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신학적으로도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간의 고유한 정신문명이나 활동은 접어두고 몸의 운동에서 인간 영혼에 관한 증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운동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인간만 훈련을 통해서 자기 몸을 탄탄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운동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두세 배, 또는 열 배 이상의 능력을 보입니다. 동물은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지만, 훈련을 통해서 그 능력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치타가 아프리카 초원에서 가장 빨리 달리지만 그건 처음부터 주어진 능력이지 훈련을 통해서 더 빨리 달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더 빨리 달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치타는 거의 비슷하게 빨리 달리고, 모든 독수리는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하늘을 날고, 모든 돌고래는 거의 똑같이 바다를 빨리 헤엄칠 뿐입니다. 인간만 훈련을 통해서 다른 사람보다 열 배나 더 피아노를 잘 연주하고, 다섯 배나 더 춤을 더 잘 춥니다. 인간의 몸과 영혼이 결합하여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뭔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이런 말을 했다면, 누구든지 나중에 이에 관해서 바른 설명을 저에게 해주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의 악한 세력은 인간의 영혼에 손을 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일도 그리스도인의 영혼까지 말살하지는 못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과연 이런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실감이 납니까? 로마 정권 아래서 살던 초기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오늘 21세기 우리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느끼는 그리스도인도 없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는 현대인들이 영혼의 문제를 몸의 문제에 귀속시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영끌’이라는 신조어가 난무했습니다. 개인들이 사용하기도 하고, 언론에서도 나오고, 전문가들도 그런 이상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영끌’은 영혼을 끌어모은다는 뜻입니다. 주로 부동산 문제에 얽혀서 나옵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들여서 아파트를 사는 젊은이들의 행태가 마치 영혼을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단어입니다. 그들 젊은이만이 아닙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노학자가 젊음을 대가로 영혼을 팔 듯이 오늘 대한민국 모두가 돈에 영혼을 팝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렇게 발버둥 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심정을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영끌에 나선 이들만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정신’(Zeitgeist)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로 영혼의 무게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영혼을 뇌의 기계적 현상으로만 설명하는 자연과학의 책임도 큽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영혼에 관한 생각이 크게 위축되었기에 모두가 몸을 죽이는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몸이 죽으면 자기의 모든 게 없어지는 거니까요.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가난하면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니까요.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기본 생각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영혼을 위축시키는 이 시대정신을 오늘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돌파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럭저럭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시대정신에 맞춰서 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수준이 형편없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웬만해서는 시대정신을 넘어서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운명도 일단 어느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반은 결정되듯이 그리스도인도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어진 조건들이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좋은 조건에서도 삶의 수준이 크게 떨어질 수 있고, 나쁜 조건에서도 복된 인생과 고품격의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숙명적으로 주어진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부분들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하나님과의 결속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과의 결속이, 즉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게 최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8절이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지옥에 떨어뜨린다는 위협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키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29절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3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다고 말했습니다.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조금 귀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 대우를 받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몸을 조금 불편하게 하는 세상의 악한 세력을 두려워할 게 무엇입니까? 문제는 이런 말씀을 막연하게 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게 무언지 모르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시간과 공간을 느낀다는 것과 손으로 스마트폰을 쥘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특별한 은총인 줄 인식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걸 당연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살이에서 이것도 문제이고 저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몸을 억압하는 세력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둘째 단락은 34~39절입니다. 첫째 단락에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들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친밀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등등입니다. 어려운 인생살이에서 그나마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나친 표현이긴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적대자들만 우리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친밀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우리를, 더 정확하게는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적대자들은 적대 행위로 인해서 어렵고, 가까운 사람은 친밀한 행위로 인해서 어렵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우리는 한편으로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친밀하다는 이유로 지나친 요구까지 들어주려다가 삶이 방전될 수 있습니다.
적대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첫 단락의 말씀과 가족을 미워하라는 둘째 단락이 가리키는 것은 인생살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그게 적대적인지 친밀한지는 차치하고, 자기의 뜻대로 모두 해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 그 어디에도 완전한 해결은 없습니다. 이런 실존 가운데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될 대로 되라 하면 되나요?
32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면 당신께서도 하늘의 아버지 앞에서(삶의 심층에서, 영혼의 차원에서) 제자들을 시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9절에서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예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믿고, 그 믿음대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해결되지 않은 삶의 곤란한 조건 가운데서도 영혼의 평화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길을 함께 가는 영혼의 도반 여러분, 세상과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