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넷째주간 이모저모 1. 예배 우리는 주기도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분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을 친근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이 가장 위대한 일 중의 하나다.”라고 갈파(喝破)한 분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머니 같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칭호가 주는 의미를 잊은 채 그냥 습관에 의해 아버지라는 칭호가 불려지지 않는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발췌 예수의 배타적 권위(막 1:21-28, 정용섭목사)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다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교훈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διδαχῇ(디다케)입니다. 영어 teaching에 해당합니다. 회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이유는 그 가르침이 서기관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배타적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가르치는 자격증으로만 말하면 서기관들의 권위가 더 높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신학 전문가들이고, 예수님은 평범한 목수입니다. 오늘날 신학대학교 교수와 평신도 노동자가 성경을 읽고 가르친다고 하면 누구에게 권위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23절부터 아주 특별한 사건을 보도합니다.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사랑이기도 하고 해방이기도 하며 궁극적인 안식이기도 합니다. 그걸 통틀어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얻었기에, 즉 구원을 얻었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땅에서 사는 동안 화려하게 살고 인기도 끌고 존경받는 인생이 된다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삶만을 원한다면 굳이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고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삶은 세상이 온갖 방식으로 제공합니다. 자본주의가 오히려 더 능력적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세련된 인생에 관한 가르침은 교회가 아니라 유튜브가 제공하는 시대입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주라고 예배 때마다 고백합니다. 모든 가르침은 이 사실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겁니다. 따라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서만 우리의 생명은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2. 교우동정 지난 한주간은 상당히 추웠지만 오늘은 많이 풀렸습니다. 다행히 교회 상수도는 얼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재정지원도 없는데 늘 중식준비에 열성을 다하시니 고맙습니다. 늘 풍성한 식탁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지금 교우중에 두 가정에 태중의 아이가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잘 모르는 교우들끼리도 어색해하지 마시고 서로 인사하고 담소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3. 운영위원회 1월 정기 운영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예결산 관련해서 심도있는 논의가 있었고, 전년도 이월금 중 일부를 선교 및 구제에 지출하기로 하였습니다. 동아리 모임(성경공부, 노래부르기, 악기연주 등)도 좀 더 다양하게 시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한 주간도 잘 지내시고 2월 첫 주 성찬식이 있는 예배시간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