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주현 후 셋째 주일, 2023년 1월 22일 마태복음 4:12, 13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관한 간략한 보도입니다. 그 보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의 체포 이후에 예수께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즈음에 예수께서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서 가버나움으로 거주지를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여행을 온 게 아니라 그곳에서 살려고 왔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미 앞에서 예수 가족이 애굽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로 돌아왔으나 헤롯의 뒤를 이은 아켈라오 왕이 두려워서 멀리 떨어진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았다고 짚었습니다.(마 2:23) 나사렛에서 ‘살았다.’라는 헬라어 ‘카토케센’(κατῴκησεν)은 영어로 ‘he dwelt’, 즉 ‘그는 (거기서) 살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가버나움 이야기에도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살았기에 나사렛 사람이라는 호칭이 붙었다면 가버나움에서 살았으니까 가버나움 사람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됩니다. 정리하면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고, 고향은 나사렛이며,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 거주지는 가버나움이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지역은 예루살렘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으로 불린 근거를 사 11:1로 보았듯이 가버나움이라는 지역도 사 9:1, 2절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이 구절(마 4:15, 16)은 예수의 소명 및 운명에 직접 연결됩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여기에 언급된 스불론, 납달리는 열두 지파의 명칭입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에서 볼 때 변방이며 오지입니다. 이를 총칭하는 이름이 갈릴리입니다. 예수께서 어릴 때 자란 나사렛도 갈릴리이고, 새롭게 거처를 마련한 가버나움도 갈릴리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근거로 갈릴리 지역에 생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겁니다. 그 빛은 가버나움에서 살기 시작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자리한 어촌입니다. 예루살렘의 시각으로 변방이긴 했으나 인근에서 가장 번창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유대인 회당이 있었고, 로마 세관도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마 4:18절 이하를 따르면 가버나움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모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대표적입니다. 마 9:9절에는 세관원이었던 마태를 부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룟 유다 외에 나머지 제자들 모두 가버나움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얼마나 오래 사셨는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모릅니다만, 잠깐 지나가듯이 머문 게 아니라 그곳에서 상당 기간 실제로 사셨을 겁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곧 제자들이 어부 일을 즉시 때려치우고 따른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친구처럼 지냈겠지요. 평소에 예수께 많은 이야기를 이미 들었고, 그들의 마음이 천천히 동요되었을 겁니다. 어느 순간에 자신들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해야겠다는 결단이 서서 출가한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지금부터는 순전히 추정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일용직 목수로 생활하셨을지 모릅니다. 외지인으로 그곳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가버나움에 사는 친구나 지인이나 친척에게서 집 방 한 칸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설교하신 적이 있을 것으로 보아(막 1:21) 가버나움에서 랍비로 사셨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겠지요. 가능성이 작긴 하지만, 예수 가족이 함께 가버나움으로 이사 온 경우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어떻게 생활하셨는지를, 즉 사생활에 관해서는 복음서 기자들은 일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마태복음 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가버나움으로 이사 온 예수님이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빛이 왜 필요한지를 절감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어둠이 아니라 이미 빛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기껏해야 사업이 망했다거나 암에 걸렸다거나 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정도로 여깁니다. 자신의 삶이 어느 정도 평안하면 흑암과 그늘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깁니다. 저는 앞에서 나사렛과 가버나움이 유대 지역에서 볼 때 변방이요 오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은 2등 시민이고, 유대와 예루살렘 주민은 1등 시민입니다. 우리나라도 큰 틀에서 수도권, 특히 서울을 1등 시민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지방 대학교가 모집 인원을 채우기 힘든 이유는 젊은이들이 온통 ‘인 서울’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게 정상이냐 아니냐 하는 건 접어두고 지방을 변방으로 보는 건 분명합니다. 일전에 경남 산청군보건의료원이 연봉 3억6천만 원을 받는 내과 의사를 10개월째 구하지 못했다는 보도를 읽고, 믿기지 않기는 하나 어쨌든지 오늘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는 거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나사렛과 가버나움 같은 변방에 사는 사람들을 촌놈으로 보았습니다. 흑암이요, 사망의 땅이요, 그늘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이 오히려 흑암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나 나사렛에 사는 사람 사이에 근본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이나 가버나움의 랍비나 모두 똑같은 하늘 아래서 똑같은 땅에 두 발을 딛고 삽니다. 모두 똑같이 하루 두세 끼 밥을 먹고 일정하게 배설해야 합니다. 똑같이 사랑하고 미워하며 즐거워하고 힘들어합니다. 서울 일류 카페에서 비싼 돈 내고 마시는 커피나 시골 다방에서 반값 내고 마시는 커피나 커피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다를 게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시에 산다고 해서 더 재미있다거나 사람이 뜸한 시골에 산다고 해서 외로운 게 아닙니다. 가끔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베리아 툰드라 같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큐멘터리로 나옵니다. 그런 곳에서는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닙니다. 나름 럭셔리하게 사는 오늘 우리의 눈에 그들은 불행하게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무조건 문명과 담을 쌓고 척박하게 사는 게 더 행복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사는 방식과 우리가 사는 방식이 크게 차이가 나는 듯이 보이겠으나 근본에서는 별로 다를 게 없다는 뜻입니다. 화려한 대형 교회당에서 많은 교인이 예배하나, 우리처럼 반지하 작은 교회당에서 적은 수의 교인이 예배하나 본질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듯이 말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 모릅니까.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는 실감이 안 된다는 데에, 또는 어느 정도 실감해도 그걸 뚫고 나갈 힘이 크게 부족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끌’이라는 신조어에서 확인하듯이 실제로는 흑암과 사망의 땅인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삽니다. 그런 삶이 익숙해지면 빛을 빛으로 느끼지 못하고 빛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여러분 자신이나 자녀가 세상에 푹 빠져서 고소득을 올리는 사람으로 사는 게 좋은지, 가난해도 예수를 인생의 빛으로 바르게 잘 믿고 사는 게 좋은지를 선택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마태복음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중에 빛이라는 메타포를 명시적으로 묘사한 복음서는 요한복음입니다. 요 1:9,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 예수께서는 우리가 생명과 진리를 보고 깨닫고 느끼게 하는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궁극적인 ‘리얼리티’를, 즉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알아야 우리 영혼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위암 수술을 앞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수술에 관해서 자세하게 알면 겁은 나겠지만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수술대에 눕습니다. 전후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의사가 칼로 자기 배를 연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낍니다. 명의가 두려워하는 환자에게 수술에 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 주듯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로 선포했고, 자기 운명으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내용이 바로 그것을 압축적으로 가리킵니다. 이 때부터 (가버나움에서 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하라.”라는 헬라어는 ‘메타노에이테’입니다. 명사는 메타노이아(회개)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걸 의미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쪽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그걸 우리의 일상 용어로 바꾸면 사랑입니다. 때로는 정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쁨이나 평화나 안식이기도 합니다. 태양 빛이 프리즘을 통해서 일곱 색깔로 보이듯이 하나님의 다스림도 각각 다르게 인식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사람의 영혼이 그렇게 풍요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영혼의 풍요로움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인생에 있을까요? 그리스도인 치고 이 사실을 모르거나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면 머리로 알아도 실제로는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 유대민족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종교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나 율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지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종의 고소공포증과 같은 그 지배 메커니즘을 근근이 버텨내면서 살았습니다.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운명입니다. 안식일에는 오백 걸음 이상 걷지 말아야 하고, 불을 피워서 요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일에 환자를 고친 예수 행위는 자신들의 그런 율법 전통을 위배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지배 메커니즘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안식일 전통을 해체하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 묶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걸 알면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여러 모양의 허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성경이 무엇인지 알며, 사도신경의 내용을 알며,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나요? 제가 조금 더 안다고 해서 아는 체하는 게 아니라 모르면서, 또는 대충 알면서 왜 알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커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모르는 정도에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잘못 아는 걸 확신할 때, 속된 표현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태가 훨씬 심각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은 지옥에 가는 게 두려워서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머리에 그려진 지옥은 유황불과 구더기와 악마가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줘야 예수 잘 믿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목사들도 있긴 합니다. 성경에 그런 표현이 가끔 나오지만 그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반어법이지 실제로 그런 지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한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일정한 사람을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떨어지게 한다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거꾸로 천국에 가서 큰 상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천국에 무슨 상이 따로 있겠습니까. 천국 자체가 상인데요. 다른 이보다 더 큰 상을 받을 욕심이 있다면 그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가 있는 겁니다. 지옥이 두렵거나 천국 상급이 갈급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흑암에 갇힌 사람입니다. 빛을 못 본 사람입니다. 가버나움 사람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선포한 하늘나라를 향해서 회개(메타노이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빛으로 경험하는 게 무엇인지를 오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개인 주택에 한밤중에 전기가 나갔다고 합시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합니다. 전기를 잘 아는 사람이 고치자 전기가 들어와서 집안이 밝아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천천히 그 세계가 눈에 들어옵니다. 전깃불보다는 보일락말락 하는 작은 촛불로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그 촛불이 두 개가 되고, 다시 세 개가 되면서 주변 사물이 조금씩 분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촛불보다는 반딧불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합니다. 한여름 밤 숲속이나 개울가에서 반딧불을 보셨는지요. 아니면 어떤 사람이 비가 쏟아지는 캄캄한 들판을 방향 감각 없이 걸어가는 중에 번개가 쳐서 방향을 잠시 잡는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천천히 길이 보입니다. 사물이 조금씩 분명하게 보입니다. 아주 천천히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다시 보이지 않는 순간도 경험할 겁니다. 포기하지 않고 빛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점점 더 그 빛을 크게 느끼고, 따라서 자기의 삶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요 8:38) 따르면 그는 하나님을 본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다른 건 좀 부족해도 좋으니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일만은 양보하지 말고 꾸준히,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붙들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모를까 빛 자체이신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니까요.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 쫓기기에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어려운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그물을 버려두었듯이 우리도 일상의 일정 부분을 ‘버려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연봉을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러 줄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연봉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는 일을, 즉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말아야겠지요. 그래야만 우리는 생명의 빛을 환하게 경험하는 데까지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는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 올 한해 영혼의 눈이 더 밝아져서 우리 삶의 근원을 더 깊이 더 시원적으로 풍성하게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빛이신 예수께 더 가까이 가야겠지요. 안심하고 그분께 접근해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를, 그가 자기의 삶을 왜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겼는지를, 왜 제자들을 부르셨는지를 실감해보십시오. 어둠이 천천히 거치면서 생명의 빛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