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이면서 동시에 삼위일체 주일이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 많이 쓰지만, 그 개념을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이런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고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며, 동시에 참된 신이다.” 예수님은 본질에서는 하나님과 일치하나 위격에서는 구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이시고, 예수님은 역사에 내재하셨다. 현재 정 목사님이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권 5장에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유튜브에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많이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체스터턴의 <영원한 사람>에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그 일부입니다. “역사적 시점에 세상을 거스르는 아타나시우스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교회 공의회들의 민주적 소동 위에 도전자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쟁점에 대해 잠시 생각해도 좋겠다. 왜냐하면 그 쟁점은 이 종교적 역사 전체와 관련이 있고, 또 현대세계는 그 전제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만일 계몽되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빈약한 교리와 무의미한 분파적 싸움의 고약한 예로 비웃고 또 제기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자는 영원히 성부와 함께 계시다“는 아타나사우스의 주장이다. 다른 한편, 만일 동일한 진보주의자들이 교리 논쟁과 상관없이 항상 순수하고 간단한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는 단 한 문장이다. 하지만 두 진술은 거의 동일하다. 적어도 전자는 후자가 없으면 난센스에 가깝다. 그 빈약한 교리는 아름다운 정서를 진술하는 논리적 방식일 뿐이다. 만일 시작이 없는 존재, 만물보다 먼저 실재한 존재가 있다면, 그분은 사랑할 대상이 전혀 없을 때 과연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그분이 상상할 수 없는 영원 내내 홀로 계셨다면, ”그분은 사랑이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미스터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본성 안에 자기표현과 비슷한 어떤 것이 있었다는 신비로운 개념이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낳고, 자기가 낳은 존재를 바라보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개념이 없으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본질을 사랑의 개념과 얽어놓은 것은 정말로 비논리적이다. 만일 현대인들이 진정 간단한 사랑의 종교를 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에서 찾아야 한다.“ -401쪽- 오늘은 대략, 현장 예배에 32명, 온라인 실시간 접속자 43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출타한 교우도 있고, 직장 일과 개인 사정으로 바쁜 교우도 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현장 예배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신병주 집사님이 오늘 예배 특별 찬양을 드렸습니다. 일찍 교회에 나와서 찬양 준비를 하고 귀한 찬양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곽종기 집사님은 포항에 거주하며 정기적으로 현장에 참석합니다. 오늘 반가웠습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에어컨은 사용하지 않고 올해 처음으로 선풍기를 돌렸습니다. 강도를 적절하게 조절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예배 후 식사 시간은 먹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시간입니다. 교우들이 정성스럽게 반찬을 해오시고, 영적인 길을 함께 가는 교우들과 함께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6월부터 3주 반찬 당번에 양연옥 집사님이 함께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반찬 메뉴도 화려했습니다. 감자 볶음, 콩 조림, 두부 샐러드, 시래기 조림 등이 나왔습니다. 제철 반찬과 건강한 먹거리로 푸짐했습니다. 포항에서 대구 현장 예배에 참석하고 반찬을 준비한 교우도 있습니다. 수고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